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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림교인의 비무장 군 복무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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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사미디어 등록일 2023.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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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림교회는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이해하는 방식이 일반 기독교회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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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육의 사건들로 점철된 한국의 근현대사와 한국의 개신교인들

해방 후 황해도 신천군에서 공산주의 북한 정권을 지지하는 세력과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 세력이 죽고 죽이는 원수로 갈라져 서로 극한적으로 대립함으로써 신천군 주민 4분의 1인 3만 3,000명이 학살되는 신천 양민 사건이 발생했다. 북한의 공산 정권의 비호를 받으며 파괴와 약탈을 자행했던 공산당 당원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인민의 적인 지주와 반민족적인 친일파라며 그들에게 약탈과 파괴를 일삼았다. 얼마 후 전쟁이 일어나서 남한의 군대와 미군이 북한 땅으로 진격하여 올라갔을 때 신천군의 그리스도인들이 같은 마을에 살고 있던 북한 정권 지지자들을 무자비하게 보복하는 일이 뒤따랐다. 


그런데 그보다 앞서 1946년에는 한반도에 천연두가 크게 유행해 4,234명이 사망했고, 한국전쟁 당시인 1951년에는 1만 1,530명이 사망했다. 한국에서는 오래전부터 천연두를 경험하고 나서 그 병명을 함부로 부르기조차 두려워해 ‘손님’이라고 일컬었다. 공산주의와 기독교는 둘 다 천연두와 마찬가지로 한국 땅에 손님으로 들어온 것이나 다름없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한국에서 이름이 많이 알려진 어느 작가는 『손님』이라는 소설로 신천 양민 학살 사건을 다루었다. 한국 땅에 천연두처럼 ‘손님’으로 들어온 것이나 마찬가지인 공산주의와 기독교 때문에 신천군과 그 밖의 여러 지역에서 한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던 한민족이 서로 죽이고 죽는 살육의 참극을 치렀다는 내용이다. 


한편 1946년 11월, 서울 종로의 YMCA 강당에서는 북한에서 내려온 평안남북도와 황해도 출신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공산당과 싸우는 단체로 ‘서북청년단’이 조직되었는데 1948년에 이들은 공산당을 박멸하는 공권력으로 행세하면서 제주도에 들어와 마치 북한 땅에서 자신들을 박해했던 공산주의자들에게 복수라도 하듯 무고한 제주도 양민들에게 공산당이라는 터무니없는 혐의로 약탈과 강간과 방화와 학살을 일삼음으로써 30만 제주도민의 10분의 1인 3만 명 이상이 살해되었던 제주 4·3사건의 첫 번째 주역이 되었다. 제주도 주민들은 이 “그리스도인들”처럼 잔인무도한 폭력배들을 이전에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오늘날 제주도에 개신교의 교세가 미약한 배경에는 서북청년단에 대한 제주도민들의 끔찍한 기억이 있다. 제주도민으로서 서북청년단이 기독교 단체임을 알고서야 어떻게 기독교에 입교하겠는가. 


그러나 역사상 공산주의자와 기독교인들만 폭력과 살육을 했던 것이 아니고 기독교인들만 원수들에게 복수를 감행했던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억울한 일을 당하면 복수하고자 한다. 문제는 원수까지 사랑하라 하시고 악인에게조차 저항하지 말라고 가르치신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들마저 폭력과 살육에서 세상 사람들과 하나도 다를 게 없다면 이제 세상 사람들은 누구와 더불어서 폭력과 살육이 없는 세상을 꿈꿀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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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들은 이 "그리스도인들"처럼 잔인무도한 폭력배들을 이전에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한반도에 '다른 그리스도인'으로 들어온 재림교회와 '살인'이라는 죄

​한국 근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는 재림교회가 일반 개신교회와 다른 그리스도교회로서 한반도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러면 재림교인은 일반 기독교인들과 어떻게 다른가? 그 하나는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이해하는 방식에서 나타난다. 일반 기독교회에서는 살인을 ‘승인받지 못한 상태에서 사람을 즉흥적으로 죽이는 것’ 또는 무죄한 자를 죽이는 것 등으로 한정하여 전쟁터에서 행하는 살인이나 국가 법률에 따라 공적으로 이루어지는 사형 등은 ‘살인 금지’에 포함하지 않는다. 


그런데 재림교회에서는 퀘이커, 메노나이트 등 다른 평화 교회들과 마찬가지로 살인 행위에 대해 어떤 예외 규정도 두지 않는다. 모든 살인 행위는 때와 장소에 구애됨 없이 언제나 살인 행위이며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살인 행위 이외의 다른 것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재림교인은 예외 없는 사랑의 원칙에 기초해 공적인 전투 행위나 살인 집행 등의 형태로도 살인을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르네상스의 왕자라고 일컬어지는 인문학자 에라스뮈스는 살인이라는 죄의 심각성에 대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일반인들과는 다르게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 사람의 아들의 하나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한 이후로 살인 행위는 단순히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을 죽인 것으로 끝나는 행위가 아니라 ‘살신(殺神)’ 곧 하나님을 죽인 행위가 된다고까지 주장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 예수로 태어났을 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의 신성한 신분을 모든 사람과 공유하여 모든 사람의 신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격상시킨 것이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사람들은 사실상 하나님을 매달아 죽인 것이며 따라서 사람을 죽이는 경우도 단지 한 인간을 죽인 것으로만 이해되는 게 아니라 예수님과 동등한 신분의 존재를 죽인 행위 곧 하나님을 죽인 것과 같다는 것이다. 



재림교인의 비무장 군 복무와 대체 복무

재림교회는 일반 개신교와 달리 살인에 대해 어떤 예외 규정도 인정하지 않으므로 ‘살인’이 주요 업무인 군대와 군 복무에 대해서도 일반 개신교와 다른 입장을 지닌다. 즉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사람들을 멸하지 않고 오히려 사람들을 구원하러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더불어 협력하려는 정신을 지니고 있으며 이 정신 때문에 사람의 생명을 해치려 하지 않고 그 대신에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모든 가능한 봉사를 제공하신 그들의 신성한 주님의 모본을 따라 비무장 군 복무자가 되고자 한다.”라고 밝히고 있다. 


1954년에 발표된 대총회 총회의 결의문은 다음과 같이 마무리된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시민의 권리와 함께 시민의 의무를 수용해 정부에도 충성하고자 하므로 민간의 복무이든지 군 복무이든지, 전시에나 평화 시에나, 제복 차림으로나 평복 차림으로나 오직 생명을 구원하는 일에 기여하는 비무장 군 복무자의 기능으로서 국가에 봉사하고자 한다.”


한국연합회 행정위원회도 한국 교회 일부 지도자들이 비무장 군 복무 신념과 관련해 타협적인 주장을 펴기 시작하던 무렵에 본교회의 기본 입장을 분명하게 재천명할 필요성을 느껴 1966년 9월 6일 <군 복무에 관한 우리의 원칙과 신념과 태도에 대한 결의문>을 결의했고 재림교회의 전통적인 주장을 재확인한 이 결의문을 1966년 11월 호 『교회지남』에 게재했다. 한국연합회 행정위원회가 비무장 군 복무 신념을 재확인한 지 3년이 지난 1969년 10월 12일에는 대총회 행정위원회도 추계회의에서 한국연합회 행정위원회의 결의와 같은 입장을 재확인했다.


그런데 대총회의 결의문에는 이전에 발표했던 주장과 달라진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최근 미국에 사는 재림 청년들 중에서 미국의 선발 징병제가 허용하고 있는 대체 복무를 선호하고자 하는 관심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대총회는 본 교회의 원칙에 따라 교회 청년들에게 (일차적으로) 군대에 입대하여 비무장으로서 군 복무를 마치는 비무장 군 복무의 입장을 권고하고 있지만 미국 병역법이 특정하고 있는 평화 신념을 지닌 미국 청년들에게 군대에 입대하는 대신 비군사적인 임무로 군 복무를 대신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으므로 재림 청년 중에도 그렇게 희망하는 사람들에게는 대체복무를 선택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1969년의 대총회 결의문은 재림 청년들이 군대에 입대하여 집총을 해도 좋고 집총을 하지 않아도 좋다는 것이 절대 아니었다.


이 문서에서 처음으로 재림교인이 재림교회의 비무장 군 복무의 신념을 선택하는 ‘개인적 종교 신념’이라는 표현이 등장했다. 즉 “재림교회는 교인들에게 비무장 전투원 군 복무의 입장을 가르치는 한편 국가에 대한 의무에 따르는 봉사 기간과 관련해 교인들이 개인적으로 결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라고 천명했다. 이러한 천명에 기초해 한국 재림교회 안에서도 집총 문제는 ‘개인의 양심적 문제이다.’라는 주장이 나타났으나 이러한 주장은 1969년의 대총회 결의문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1969년 이전에는 미국의 병역법이 비무장 군 복무와 대체복무를 오직 역사적 평화 교단들(예컨대 퀘이커, 메노나이트, 재림교회 등)에 소속된 그리스도인들에게만 제한적으로 허용했으나 미국의 새로운 병역법인 선발 징병제는 미국 헌법의 정교 분리 원칙에 좀 더 충실하겠다는 취지에서 역사적 평화 교단에 소속되어 있느냐의 여부에 상관없이 오직 일개인이 비폭력, 비군사적 신념을 지니고 있느냐에 따라 그 개인의 신앙 양심을 존중하여 비무장 군 복무나 대체복무를 선택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으므로 우리 교회 대총회가 미국의 새로운 병역법에서는 재림교인들도 입대할 때 비무장 군 복무를 개인적으로 선택해야 한다는 사실을 주지시켰던 것이었다. 그리고 재림교회가 교인들에게 비무장 군 복무를 우선적으로 추천하고 만약 개인적으로 신앙 양심에 따라 대체복무를 선택하고자 한다면 그 선택을 허용하겠다는 입장은 1972년 북미지회 추계 회의와 1985년 대총회 총회에서 거듭 천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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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 초기에는 한국의 재림 청년들이 신앙 양심에 따라 비무장 군 복무를 주장하다가 야만적인 체형으로 실신하도록 구타당하는 일이 빈번했다.


재림교회는 집총 자체를 죄라고 규정하지 않는가?

1976년에 한국 재림교회 군봉사부 관계자가 『교회지남』에 게재한 기사에서 “본 교단은 총이라는 물체 자체를 죄라고 보지 않으며 그 총을 잡는 행위 자체를 죄라고 규정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한 적이 있다. 그러나 미국에서 재림교인들은 역사적으로 자기 자신을 “양심상 무기 휴대를 거부하는 자들”이라고 주장해 왔으며, 미국 정부에 대해 미국 국회가 “양심상 무기 휴대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제정한” 법률의 혜택을 요구해 왔다(F. M. Wilcox, Seventh-day Adventists in the Time of War, 58).


미국 정부는 무기를 휴대하지 않으려는 양심을 보호하고자 1940년 9월에 통과된 특수 훈련 및 그 복무 규정 제5항에서 “비무장 군 복무”를 세 가지로 규정했다. 첫째, “언제나 비무장 부대 안에서 근무하는 군 복무”, 둘째 “의무(위생병)부대 안에서 근무하는 군 복무”, 셋째, “기본적인 업무가 무기 휴대나 무기 사용을 요구하지 않는 곳에서 근무하는 군 복무”이다. 


또 1949년에 발표된 트루먼 대통령의 실시령은 무기의 휴대뿐 아니라 무기에 관한 연구와 무기 취급에 관련된 어떤 훈련도 포함되지 않는 “비무장 전투원 훈련(non-combatancy training)”을 별도로 규정했는데 이 모든 조치는 “무기를 잡는(집총하는) 행위를 포함해 무기에 관련된 일체의 행동에 죄책감을 느끼는 양심”을 보호하기 위한 법률적 조치들이었으며 대총회는 언제나 재림교인이 미국 법률의 이런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 왔다. 


미국 등 선진 자유 국가들의 헌법과 UN의 인권 선언은 “무기 휴대를 거부하는 양심의 자유”를 인정하고 보호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지닌 것으로 존중되는 UN 인권 선언 제18조는 “사상, 양심, 종교의 자유”를 남에게 넘겨줄 수 없는 인간의 기본 권리로 규정했고 UN 인권 위원회는 1987년, 1993년, 1995년, 1998년과 그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일정한 기간이 지날 때마다 인권에 대한 결의문을 새롭게 발표해 왔으며 재림교의 대총회 또한 1972년 이후에도 대총회 총회 때마다 ‘평화 메시지의 성명서’, ‘민간에 대한 공격 무기 판매의 금지’, ‘평화를 위한 호소’, ‘이라크 전쟁에 대한 성명서’, ‘군 복무에 대한 대총회장의 명확한 의견’ 등의 문서를 계속 발표했다.



재림교인 병사들의 이중 충성

재림교회가 군 복무와 관련하여 취하고 있는 입장은 일반 개신교회와 다를 뿐 아니라 다른 평화 교단들과도 다르다. 평화 교단 중에는 양심적 참전 반대의 신념을 좇아서 군 입대를 거부하고 있으나 한국의 재림 청년들은 1950년 한국 전쟁이 시작된 이후로 국가가 세상의 동기에 기초해 자신들을 강제로 징집했을 경우에도 결코 신앙 양심을 내세워 조국과 민족의 고통을 외면하려 하지 않았기에 징집을 반대하거나 피하지 않고 입대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 먼저 순종하려는 그리스도인들이었으므로 그들에게 조국은 충성의 대상이지만 하나님과 같이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순종을 요구할 수 있는 영원하고 절대적인 권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는 잠정적이고 상대적 권위이므로 하나님의 율법과 세상 나라의 율법이 충돌할 때는 언제나 하나님의 절대적인 율법을 먼저 더 존중했고 오직 하나님의 뜻 안에서 조국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고자 했다. 그리고 하나님께 충성하는 길이야말로 진실로 조국과 민족에도 이바지하는 길이라고 확신해 군대 안에서도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조국에도 충성을 다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들의 이 같은 소망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국가가 재림 청년들의 이중 충성을 충분히 배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재림 청년들은 극심한 고난을 겪어야 했다. 한국 전쟁 초기에는 한국의 재림 청년들이 신앙 양심에 따라 비무장 군 복무를 주장하다가 야만적인 체형으로 실신하도록 구타당하는 일이 빈번했고, 1958년부터는 재림교인 집총 거부자에 대해 구타와 고문 대신에 군사 재판에서 6개월, 1년, 3년씩 징역형을 선고하기 시작했으며 이 같은 관행이 1970년까지 이어졌다.


1950년에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시작된 한국 재림 청년의 군 복무 역사는 1970년을 전후하여 크게 두 기로 나누어진다. 1기는 1950~1970년이며 2기는 1971년부터 현재까지이다. 제1기는 한국의 재림 청년들이 안식일 준수와 함께 비무장 군 복무의 신념을 고수했던 시대였고, 제2기는 한국 재림교회가 청년들에게 비무장 군 복무의 신념을 포기하고 안식일 준수만 고수하도록 가르친 시대이다.


1960년대 이후 본 교회의 비무장 군 복무자에 대한 군사 정부의 무자비한 탄압이 가중되고 있는 상황에서 1970년대 초 재림 청년들에게 비무장 군 복무 신념을 포기하도록 권했던 한국 교회 지도부의 결정에는 이해되어야 하는 부분이 있다. 그러한 결정은 한국의 재림 청년들이 겪는 극심한 고난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다는 부모의 마음에 기초했던 것이라 하겠다.


우리 청년들은 어려운 시대적 상황에서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해서 비무장 군 복무의 신념을 감당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교회가 전혀 사실이 아닌 주장들로 한국의 재림 청년들을 오도하고, 본 교단이 역사적으로 주장해 온 비무장 군 복무 신앙 신념 자체를 부정하면서 본 교단의 귀중한 신앙 신념을 훼손할 뿐 아니라 한국 전쟁 이래로 군 병영과 영창과 군사 재판과 육군 형무소에서 기도와 눈물과 피로써 신앙의 새 역사를 엮어낸 한국 재림 청년들의 귀중한 명예를 인신 공격적인 비난과 비판으로써 크게 손상한 점은 유감스럽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모쪼록 새 시대를 만나 본 교회의 비무장 군복무의 신앙 신념이 회복되기를 기원한다. 



- 오만규 삼육대학교 신학과 명예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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