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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저녁 예배가 만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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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사미디어 등록일 2024.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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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1월 15일 화요일은 내게는 잊을 수 없는 내 삶의 방향이 바뀌게 된 날이다. 중동에서 걸프전이 발발하던 그날 밤 내가 교회를 다녀온 사이에 집안에 도둑이 들었다. 


회사원에서 중간상으로

그 이야기를 하자면, 나는 한국고압용기 주식회사 품질관리과에 3년여 동안 근무를 하다가 퇴사하여 쉬던 중 함께 근무했던 집사님의 소개로 금 나카마(중개 상인)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것은 서울 종로3가 뒤편 금제품 관련 총판에서 물건을 사서 금은방으로 가져가 판매하는 일이었다. 경기도 이천에서 시작하여 여주, 원주와 또 서남쪽으로는 수원, 오산, 평택까지 일주일 코스로 금은방을 찾아 거래처를 확보하고 제품을 파는 것이었다. 그 무렵 나는 결혼하여 태어난 첫딸이 있었다. 처가가 서울이라 아내는 바쁜 나를 대신해 종종 아기를 업고 종로에 가서 물건을 사는 일을 하였다. 이 일을 시작할 때 소개해 주신 김판식 집사님이 “이 집사는 화요일에 교회 출석할 수 있을 정도로만 거래처를 확보하면 좋겠다.”라고 조언해 주었다. 나도 화·금·토요일에 교회에 빠지지 않고 다니고 있었고 안식일을 자유롭게 지킬 수 있는 직업이라 경북 영천에서 3일을 따라다니며 일을 배운 뒤 그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첫날부터 경험한 은혜

교회는 집에서 가까운 이천교회에 다니며 소개받은 대로 금장사라서 옆집 사람도 내가 무엇을 하는지 모르게 했다. 금 나카마 대부분은 처음 시작할 때 공치는 경우가 많다는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첫날 버스를 타고 수원에 도착해 수십 곳의 금은방을 돌며 인사하고 제품을 열어 소개하는 가운데 두 집이 제품을 사주었다. 그 수입이 회사의 일당보다 2배 이상이었다. 대부분 금은방은 열어 보지도 못하게 거절했고 그러면 다음에 들르겠다고 인사하며 다른 집을 찾아 수원 거리를 도보로 하루 종일 보낸 결과였다. 그렇게 월·화·수·목·금·일요일을 일하며 하루도 빠짐없이 수입을 얻도록 도우셨다. 여러 달이 지나자 단골 거래처가 확보되고 원주 여주 이천 수원 오산 평택까지의 거래처가 확보됐다. 수입도 많아져서 부모님께 용돈 10만 원을 매달 보내드리고 월정헌금은 두 배 이상 드리며 교회에서는 학생반을 시작해 소수의 학생을 지도하는 가운데 이젠 일요일에도 쉬면서 학생반을 성장시켜야겠다고 생각하던 중 1991년 1월 15일 화요일을 맞았다.



열려 있는 대문

그날은 중동의 전쟁 위기로 금값이 다락같이 올라서 가는 곳마다 다음에 오라고 하였다. 그날 60여 만 원의 판매를 마쳤고 보통 화요일은 일을 마치면 시간이 없어서 택시를 타고 바로 교회에 가곤 했는데 그날은 일찍 끝나 걸어서 집으로 간 다음 수입금을 정리해 보관하고 2층 연립주택 문단속을 이중으로 한 뒤 걸어서 교회에 갔다. 추운 겨울인데 마침 교회 온풍기가 고장나서 류영렬 목사님의 제안으로 사택에서 예배를 드린 후 장기와 윷놀이를 하자고 하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11시경 집 계단을 올라갔다. 그런데 대문이 삐죽 열려 있는 것이었다. 분명히 이중 잠금장치를 했기에 도둑을 직감하고 올라와 보니 장롱과 서랍이며 온 집안이 뒤집혀 있었다. 금 가방은 부서졌고 가방 속의 보석함과 전자저울은 사라지고 망가진 빈껍데기 가방만 펼쳐져 있고 수입으로 보관한 현금까지 찾아내 다 가져가 버렸다.



왜 하나님은 이런 상황을…

나는 그때 내에게 있는 자금 모두와 빌린 자금을 다 투자해 제품을 늘려 가고 있었기에 말 그대로 1원 한 푼도 없는 빈털터리가 되었다. 하늘이 무너진 것 같고 가슴이 조여 왔다. 경찰에 신고하여 다녀갔으나 별 소용이 없었다. 내가 화요일에 교회에 간다는 것을 사전에 확인하고 뒤쪽 베란다를 타고 올라와 사랑방에 걸린 유리문 문고리 부분만 깨고 들어온 것이다. 아내는 제품을 사러 서울에 갔다가 처가에 있어서 홀로 이 일을 겪으며 억장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모든 돈도 직업도 잃어버렸다는 생각에 앞날이 캄캄했다. 왜 하나님은 이런 상황을 내게 허락하셨는가? 온전한 십일조를 구별하였고 교회와 부모님께 최선을 다했는데…. 마구 흐트러진 집에서 그날 밤 북받쳐 오르는 울음을 참지 못해 홀로 소리 내어 울었다. “주님! 또 다른 길을 마련하사 걷게 하시려고 이 시련을 주신 것인가요?” 다음 날 아침, 아내와 처형과 처남 그리고 장모님이 급히 내려오셨다. 도둑을 맞닥뜨렸다면 신변의 위험도 있었을 것이라며 그나마 안 다친 것이 다행이라는 위로의 말을 들으니 정말 그렇다는 생각이 들어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나는 망가진 빈 금 가방을 앞에 두고 훗날 이것이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기에 기념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는 도둑놈이 아니라

술도 담배도 안 하고 워낙 성실히 일했던지라 총판 여러 곳에서 제품을 채워 줄 테니 다시 일해 보라는 제안을 여러 번 받았으나 또 다른 길로 인도하시려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손길이라는 생각이 들어 일을 정리하고 그만두었다. 이후 가족들과 지인들의 강권으로 신학을 공부하기로 했다. 그리고 부족한 이 사람을 하나님의 은혜로 공부를 마치게 하셨고 1995년 10월 졸업 후 11월에 묵동교회에 임시로 파견됐다. 이듬해인 1996년 3월, 35세 나이에 인턴 전도사로 정식 목회의 첫 발걸음을 묵동교회에서 시작하게 하셨다. 돌이켜보면 그동안 많이 부족한 목회 사역이었지만 이제 은퇴 2년을 남겨두기까지 크신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목회를 시작한 이후 1991년 1월 15일 화요일 예배가 내게는 나를 목사로 만든 특별한 화요일 예배였고, 그날 밤의 도둑을 나는 늘 도둑놈이 아니라 도둑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인도하심이었음을 그저 감사할 뿐이다.


33년 전 그때 나의 일기장에는 이렇게 글이 마무리되어 있었다. “하나님의 사랑과 그 지배하시는 섭리에 대한 신앙은 걱정과 근심의 짐을 덜어 준다. 이것은 최고의 행운에서나 최저의 불운에서도 마음에 기쁨과 만족으로 충만하게 한다(부조, 282). 주여! 모든 저의 앞길을 지배하시고 섭리하사 인도하옵소서. 저의 아버지여! 1991. 1. 18.”



​이종식 ​원주삼육중고등학교 교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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