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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색업자에서 헌신적인 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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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월호 2024년 4월호 재림교회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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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색업자에서 헌신적인 종으로


스벤 옌센, 비르테 바위에르


카를 크리스티안 한센 1세는 덴마크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초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자신이 사랑하는 사업을 위해 시간과 노력, 재산을 바쳤다.*


초기 생애

카를은 1849년 4월 27일 덴마크 게라의 작은 농가에서 태어났다. 7~14세 때 그는 겨울에는 초등학교에 다니고 봄과 여름에는 형과 함께 양치기로 일하며 대가족의 부양을 도왔다. 열네 살이 되었을 때 그의 아버지는 그가 올보르에서 염색공 견습 과정을 밟도록 주선했고 후에 그가 유년기를 보낸 집 근처에서 자신의 염색 사업을 시작할 수 있도록 도왔다.

카를은 루터교인이 대부분인 지역에서 자랐다. 침례교인과 감리교인은 반대파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어머니와 누이가 감리교인이어서인지 그의 아버지는 모든 신자에게 관대해 보였다. 카를은 특별한 종교적 신념이 없었다. 그러다 1877년 어느 침례교 목사(훗날 재림 신자가 되었다.)가 그에게 성경을 한 권 팔면서 전환점을 맞았다. 그는 그 책을 살펴서 자신이 사는 지역의 여러 종교적 견해와 관련성이 있는지 알아보기로 결심했다.

그해 여름, 아내 유니아가 감리교인이 되었다. 아내의 개종 직후 카를은 욥기 28장 28절을 발견했다. “또 사람에게 말씀하셨도다 보라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 이 구절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그 순간부터 그는 급격한 영적 변화를 경험했다.


재림 기별을 접하다

카를이 재림 기별을 처음 접한 것은 어느 침례교인 가정을 찾아갔을 때였다. 탁자 위에 다니엘서 10장에 관한 글이 실린 잡지가 있었고 그의 관심을 끌었다. 그는 주인에게 그것이 어떤 출판물인지 물었다. 주인은 “미국에서 만들어진 것 같은데 아무런 가치도 없어요.”라며 얼버무렸다. 그러고는 잡지를 치워 버렸다.

카를은 그 잡지의 이름이 『아드벤트 티덴데(Advent Tidende)』이며 1878년 5월에 J. G. 마테손이 편집하여 발행했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그는 재림교회 선교사인 마테손이 덴마크에서 많은 종교적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금주(禁酒) 운동을 시작했다는 기사를 신문에서 읽은 바 있었다. 마테손은 카를이 사는 곳에서 약 50km 떨어진 알스트루프에서 몇몇 집회를 열고 있었지만 카를은 참석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1878년 9월, 마테손의 조력자 중 한 사람인 크누드 브로르손이 카를의 마을을 방문했다. 크누드는 그곳 감리교 목사를 찾아갔으나 집에서 그를 만나지 못하자 64쪽 분량의 전도지 『신약의 안식일』을 남기고 떠났다. 얼마 뒤 카를은 그 감리교 목사를 찾아가 어느 침례교 목사가 그의 집을 방문해 사람들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설득했다고 전했다.

“글쎄요.” 감리교 목사는 카를의 말에 이렇게 답했다. “침례교인들은 성경에 너무 의존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러면 성경을 따라야 할 테니까요.” 카를은 “감리교인은 성경을 따르지 않나요?”라고 되물었다. 그러자 목사는 “성경을 따르려면 토요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해요.”라고 대답했다. 카를은 충격을 받았다. 그는 성경에서 일요일을 지키라고 되어 있는 게 아니냐며 목사와 논쟁을 벌였다. 목사는 “그런 구절은 없어요. 소책자를 하나 가져가서 읽어 보시면 생각할 부분이 있을 겁니다.”라고 답했다. 그 전도지가 바로 J. G. 마테손이 쓴 『신약의 안식일』이었다.

2주 동안 카를과 아내는 소책자를 살피고 성경과 비교하며 완전히 빠져들었다. 조사를 마친 후 그들은 안식일 진리를 확신했고 다음 안식일에 카를은 그의 가게 문을 닫았다. 

거의 곧바로 시련이 닥쳤다. 감리교 목사를 비롯한 친구들이 그와 그의 아내를 유대인이라며 조롱했다. 그는 몇 번이나 믿음이 흔들렸고 자신이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는 두려움을 느꼈다. 크누드가 그를 도우러 왔고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는 시편 119편 105절을 가리키며 그에게 확신을 주었다. 그날 이후로 카를은 결코 그 진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1879년 5월 9일, 카를과 유니아는 침례를 받았다. 3개월 뒤 교인 8명으로 드로닌글룬 교회가 세워졌다. 크리스틴 크리스텐센이 목회자(카를에게 성경을 팔았던 전직 침례교 목사), 카를은 재무와 서기로 봉사했다. 1880년 5월 30일, 덴마크합회(북미 이외 지역 최초의 재림교회 합회)가 7개 교회로 조직되었다. J. G. 마테손은 합회장, 카를은 서기, J. P. 마드센은 재무를 맡았다.


교회 봉사

당시 덴마크에는 재림교회 서적을 구입할 중앙 사무소가 없었다. 1881년 9월에 열린 두 번째 합회 모임에서 출판 사업을 위한 첫 단계를 밟았다. 교회 지도자들은 카를에게 지역 출판사 설립을 맡겼다. 그는 사업 허가를 받고 4년 동안 교회 서적을 제작·배포하는 일을 담당했다.


1883년, 드로닌글룬 교회는 자녀들을 위한 기독교 교육의 필요성을 깨달았다. 카를은 10명의 어린이를 모아 교육부에 학교 설립 허가를 신청했다. 카를은 그의 자서전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 프로젝트는 모두가 만족할 만큼 성공했고, 나와 아이들 사이에는 매우 좋고 서로 마음이 통하는 유대감이 있었다. 그 후 몇 년 동안 그들이 주님의 길을 걷고, 오늘날까지 하나님 교회의 성도로서 서 있다는 사실에 나는 큰 기쁨을 누렸다.” 이 학교는 유럽 최초의 재림교회 학교였다.

카를은 37세에 목회 자격을 얻어 외스테르브라에서 1년간 일했다. 16번의 성경 강연이 끝날 무렵, E. G. 올센이 방문해 5일 동안 8번의 추가 집회를 개최했다. 침례가 이어졌고 또 하나의 새로운 교회가 세워졌다. 

1888년, 카를과 그의 가족은 오덴세로 이사했고 그곳에서 출판부장으로 일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는 자기 집에 거주하던 청년 일꾼 넷을 관리했다. 3년 후 카를은 서적 관리직에서 벗어나 성경 작업과 복음 전도 활동으로 복귀했다. 1894년, 코펜하겐에서 개최한 덴마크합회 연례 회의에서 카를은 다른 두 명과 함께 안수를 받았다. 안수식은 L. 욘손 합회장과 대총회에서 온 S. N. 해스컬, 유라이어 스미스에 의해 거행됐다. 

1897년, 한 요양 시설이 프레데릭스하운에 있는 프리덴스트란 학교 캠퍼스로 옮겨졌고 미국 이외 지역 최초의 재림교회 요양원인 프리덴스트란 요양원이 문을 열었다. 카를은 코펜하겐으로 이사할 때까지 학교와 요양원 양쪽에서 사업 관리인으로 일했다.


말년의 생애와 업적 

1905년 3월, 카를은 사업관리직을 그만둔 뒤 건강 관련 제품 판매점을 매입해 '사나(Sana)'라는 가게를 개점하고 건강 생활 방식을 장려하는 데 모든 열정을 쏟았다. 1916년, 그는 그 자신이 표현한 대로 “나의 모든 시간을 주님의 봉사에 온전히 바치기 위해” 딸 크리스틴에게 가게 소유권을 넘겼다. 그는 정기적으로 교우들을 방문하고 가정 집회를 열고 수확 운동에 즐겨 참여했으며, 말씀을 전하면서 코펜하겐 외곽의 작은 교회 두 곳에서 봉사했다. 카를은 1932년에 별세했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백과사전(encyclopedia.adventist.org)에 소개된 이야기를 허락하에 각색하여 소개했다.


스벤 하겐 옌센(M.Div) 목사, 편집자, 부장, 교회 행정가로 50여 년간 교회를 섬겼다. 비르테 바위에르(M.A.) 40여 년간 북유럽지회 총무, 덴마크에서 부편집인, 교사, 학교장, 동덴마크합회 및 서북유럽연합회 교육부장으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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